녹은달빛(조선시대 멜로소설)
녹은 달빛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장편 멜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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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어느 봄밤, 창덕궁 후원의 연못가.
달빛 아래 한 여인이 홀로 서 있었다. 그녀의 곱게 빗어 올린 가체 사이로 흐르는 비단 장신구가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났다. 가녀린 손끝이 연못 위를 스치듯 지나가고, 고요한 물결이 번져간다.
그때, 저 멀리 한 사내가 다가왔다. 깊은 밤에도 단정한 도포를 걸친 그의 얼굴에는 감정을 감춘 듯한 기품이 서려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습니까?"
여인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 사라졌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뜨겁고도 아픈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서로의 운명이 뒤틀린 게 죄라면, 제 죄는 그것을 사랑한 것이겠지요."
그녀는 쓸쓸히 웃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제는... 잊어야 하겠지요."
그렇게 두 사람의 운명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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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봄비에 젖다
조선 영조 32년.
한양의 봄은 유난히도 화사했다. 버들가지가 연둣빛으로 피어나고, 저잣거리에선 봄을 맞이하는 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런 한양의 거리를 말을 타고 달리는 한 사내가 있었다.
"좌포청 소속 도사 강윤재, 왕명을 받들어 도성을 순찰 중이오!"
단단한 인상의 사내, 강윤재. 그는 왕의 신임을 받는 금부도사로, 강직하고도 냉철한 성품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그의 마음이 흔들렸다.
"저 아이는 누구냐?"
윤재의 시선 끝에는 비에 젖은 채 가만히 서 있는 여인이 있었다.
비단 치마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지만, 그녀의 기품은 감출 수 없었다. 섬세한 이목구비, 그 안에 담긴 고요한 슬픔.
"소녀의 이름은 홍연이라 하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정했다.
강윤재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디선가 본 듯한, 낯설고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저잣거리에서 "도망자다!"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윤재는 곧장 말을 몰아 소란이 난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남겨진 홍연은 손안의 작은 옥패를 가만히 쥐었다. 그것은 왕실에서만 사용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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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금기된 인연
며칠 후, 윤재는 홍연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그녀는 도성에서 자취를 감춘 세도가의 여식이었다.
"부친은 역모죄로 몰려 유배를 갔고,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딸이 살아 있었다고?"
윤재는 혼란스러웠다.
더욱이 홍연이 들고 있던 옥패. 그것은 일반인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날 밤 그는 다시 그녀를 마주하게 된다.
"왜 도망쳤소?"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절망이 담겨 있었다.
윤재는 그녀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를 지킨다는 것은 곧, 자신까지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제3장. 밀려드는 그림자
홍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한양의 밤거리는 고요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끝없는 파도가 일고 있었다.
강윤재와의 만남 이후, 그녀는 점점 더 깊은 위기에 빠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안에 있는 왕실의 옥패—그것이 그녀를 보호하는 동시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 옥패를 가진 자는 분명 왕실과 관련이 있다."
그것을 지켜보던 윤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것을 어디서 얻었소?"
홍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답을 주저하는 그녀를 보며 윤재는 알 수 없는 초조함을 느꼈다.
"내가 믿어도 되는 사람이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빛만은 단단했다.
윤재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와 촛불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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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궁 안의 밀명
윤재는 금부도사로서 왕의 특별한 밀명을 받았다.
"최근 도성 내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오래전 역모죄로 몰린 가문의 잔당이 있다 하더구나."
영조의 눈빛은 예리했다.
"그 잔당 중에 살아남은 자가 있소. 그리고 그 자가 바로…"
윤재는 숨을 삼켰다.
"홍연이다."
그녀가 연루된 사건이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왕실과 세도가의 암투,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비밀.
윤재는 혼란스러웠다. 이제 그가 보호하려는 여인은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라, 거대한 음모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그의 운명을 바꿀 선택이 될 것임을 알지 못한 채.
제5장. 붉은 그림자
홍연은 윤재의 품에 안긴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실루엣이 길게 드리웠다.
"괜찮소?"
윤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네… 하지만, 저들을 피할 수 있을까요?"
홍연의 손끝이 떨렸다. 방금까지도 그녀를 쫓던 검은 그림자들—분명 금부도와 대비마마의 사람들이었다.
윤재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확실해졌소. 누군가가 대비마마의 명을 받고 그대를 제거하려 하고 있소."
홍연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녀가 두려워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윤재 대감, 이제 저를 지켜줄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윤재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미 시작한 일이오. 끝까지 함께할 것이오."
그렇게,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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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가려진 진실
한성부의 밀실.
윤재는 어두운 방 안에서 왕의 밀지를 펼쳤다.
"홍연, 그녀를 보호하라. 그러나 그녀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왕은 그녀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의 진실을 알고 싶어 했다.
‘그녀가 왕실과 어떤 관계가 있기에…?’
윤재는 문득 홍연이 가진 옥패를 떠올렸다. 단순한 세도가의 딸이 가질 물건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걸 보고 계셨군요."
홍연이었다.
"대감께서도 알고 싶으신 겁니까? 제 정체를."
그녀는 담담하게 물었다.
윤재는 답하지 못했다.
홍연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서 밀지를 거두어 갔다.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러나 그때 후회하셔도 늦을 것입니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그러나 말할 수 없는 듯한 표정으로.
그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윤재 대감, 위험합니다!"
그들을 덮쳐 오는 발소리.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7장. 비밀의 문
“어서 피해!”
윤재는 홍연의 손을 잡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있던 자리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대감! 여기로!"
저편에서 윤재의 부하인 김석주가 손짓했다. 그는 미리 마련해둔 은신처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숨을 돌린 윤재는 홍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목을 잡은 자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말해 주시오, 대체 왜 그대가 이런 위험에 처한 것이오?"
홍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제가 가진 이 옥패… 단순한 왕실의 물건이 아닙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품에서 옥패를 꺼냈다. 윤재는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 문양은… 왕실에서도 극소수만이 사용하는 것이오."
홍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옥패는 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선왕의 혈육입니다."
윤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말이오?"
"선왕께서는 생전에 대비마마의 눈을 피해 은밀히 후궁을 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궁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
윤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선왕께서 돌아가신 후, 대비마마는 저를 없애려 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이름을 버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홍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도 저를 없애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제가 살아 있는 한, 대비마마와 그들을 위협할 수 있으니까요."
윤재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지켜야 할 이유는 더욱 분명해졌소."
홍연이 놀란 눈으로 윤재를 바라보았다.
"대감께서는 제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저를 지키시겠다는 겁니까?"
윤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 그대의 운명에서 등을 돌릴 수 없소."
그 순간, 밖에서 다시 인기척이 들려왔다.
"찾았다! 여기다!"
또다시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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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결의
윤재는 홍연을 보호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이제 도망만 다닐 수는 없소. 내 목숨을 걸고라도, 그대를 안전하게 만들 것이오."
홍연은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렇게까지 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윤재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이유를 이제 스스로 깨닫고 싶소."
그녀의 심장이 요동쳤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잡아라!"
운명의 칼날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제9장. 숨겨진 칼날
문이 부서지며 무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윤재는 검을 뽑아 막아섰고, 홍연은 한 발 물러났다. 그러나 적은 많았다.
“대감, 어찌할까요?”
김석주가 이를 악물며 윤재에게 물었다. 하지만 윤재는 짧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들은 금부도에서도, 대비마마의 사병들도 아니다.'
그 순간, 무리 중 하나가 외쳤다.
"공주 마마를 모셔라!"
공주 마마.
그 말에 홍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윤재는 혼란스러웠다. 만약 저들이 홍연을 죽이려는 자들이라면, 왜 ‘모셔라’고 했을까?
그리고 그 순간,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오랜만이오, 홍연."
윤재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사내는 왕세자 이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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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뒤엉킨 운명
홍연은 숨을 삼켰다.
"…전하."
이선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윤재는 경계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여길…"
이선은 윤재를 흘끗 보며 말했다.
"그대가 내 여인을 지키고 있더군."
순간, 홍연이 움찔했다. 윤재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내… 여인?"
이선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홍연은 내 사람이다. 아니, 내 약혼녀였소."
윤재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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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가면 뒤의 진실
"전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윤재가 묻자, 홍연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사실을 말해 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대감."
그녀는 이선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저는 선왕의 혈육이자, 원래부터 세자빈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윤재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대비마마께서는 제가 왕위 계승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저를 없애려 하셨지요."
이선은 홍연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내가 그대를 숨겼소. 그리고 지금, 다시 그대를 되찾으러 왔소."
홍연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이선을 바라보았다.
윤재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바로 그때, 이선의 뒤편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전하, 위험합니다!"
윤재는 반사적으로 홍연을 밀어내고 검을 뽑았다.
그 순간, 날카로운 비수가 이선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홍연이 몸을 던졌다.
"홍연!"
그녀의 치맛자락이 찢어지고, 새빨간 피가 바닥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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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붉은 달 아래
홍연이 쓰러졌다.
윤재와 이선은 동시에 그녀를 붙잡았다.
"홍연! 정신 차려라!"
이선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윤재는 이를 악물었다.
'이건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다. 누군가, 이 나라를 흔들려 하고 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홍연을 보며 결심했다.
"나는 끝까지 그대를 지킬 것이오. 설령 왕세자 저하를 적으로 돌리더라도."
이선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대가 감히 내게 도전하겠다는 것이오?"
윤재는 검을 단단히 쥐었다.
"지금부터는, 홍연이 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직접 묻게 될 것이오."
홍연은 흐려진 시야 속에서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나는…"
운명의 순간이었다.
제13장. 그녀의 선택
"나는…"
홍연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윤재와 이선.
두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홍연의 눈은 흐릿했다. 피가 너무 많이 흘렀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녀는 아득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 대비마마의 차가운 눈빛, 그리고…
왕세자 이선과의 첫 만남.
"홍연, 너는 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때부터 그녀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운명을 바꾸려 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지켜주겠소."
강윤재.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신분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다만,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을 뿐이다.
홍연의 손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 또 한 번의 비수가 날아왔다.
"위험하오!"
윤재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비수는 그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윤재는 깨달았다.
'이건… 우리를 이간질하려는 자들의 계략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선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강윤재, 네가 감히 왕실의 여인을 탐하려 했느냐?"
"그게 아니라…"
윤재가 변명하려는 순간, 이선은 칼을 뽑았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다. 이제 너는 반역자다."
홍연은 마지막 힘을 다해 외쳤다.
"아니야! 윤재 대감은—"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피에 묻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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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도망자
그날 밤, 한양에 명이 내려졌다.
"금부도사 강윤재, 왕실을 능멸한 죄로 추포하라!"
윤재는 한순간에 도망자가 되었다.
"이럴 수는 없어…"
그는 어둠 속에서 헝클어진 머리로 숨을 죽였다. 이제 한양 전체가 그의 적이었다.
홍연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왕세자 이선의 손안에 있었다.
‘이건 대비마마의 계략일지도 모른다.’
윤재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낡은 담장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윤재 대감, 살아 있군요."
그가 돌아보자, 검은 두건을 쓴 사내들이 서 있었다.
"너희는 누구냐?"
그들의 우두머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세자의 적들이오."
그들의 눈빛은 차가웠다.
"당신이 살아남고 싶다면, 우리와 손을 잡으시오."
윤재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좋다. 하지만 한 가지만 약속해라."
"무엇이오?"
윤재는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홍연을 구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 순간, 한양의 어둠이 더 깊어졌다.
제15장. 뒤집힌 운명
윤재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강 대감, 우리가 약조한 대로 홍연 낭자를 구했습니다."
그들이 비켜서자, 피투성이가 된 홍연이 나타났다.
"홍연!"
윤재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의 몸은 차가웠다.
"괜찮소. 이제 괜찮소…"
그러나 홍연은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감… 모든 게 끝나지 않았어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모든 건, 왕세자의 계략이 아니었어요."
윤재는 순간 숨을 멈췄다.
"…무슨 말이오?"
홍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 모든 음모의 시작은… 대비마마도, 왕세자도 아니었어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진짜 배후는…"
그리고 그 순간, 문이 박차고 열렸다.
"강윤재, 네 죄를 물으러 왔다!"
붉은 갑옷을 입은 자들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 선두에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현왕, 영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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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사필귀정(事必歸正)
왕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강윤재, 네가 감히 왕실을 능멸하고, 내 명을 거역하며, 반역을 도모했단 말이냐?"
윤재는 놀라지 않았다.
"전하, 신이 감히 반역을 도모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찌 설명하겠느냐?"
왕은 홍연을 가리켰다.
"그 여인이 왕실의 피를 이었다 하더라도, 네가 보호할 이유는 없다. 그녀는 이미 폐서인(廢庶人)된 몸이다."
홍연은 힘없이 미소 지었다.
"전하께서는 처음부터 알고 계셨군요."
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네 목숨을 거두었어야 했겠지."
홍연은 쓰러질 듯 몸을 떨었다.
"그러나…"
왕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나는 너를 살려두었다. 내가 직접 네가 진실을 말하게 하기 위해."
윤재는 왕의 말을 곱씹었다.
"진실이라 하시면…"
그 순간, 왕의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이제야 때가 되었군요."
그는 바로, 조정의 실세 좌의정 민서훈이었다.
윤재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배후였군."
민서훈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대비마마와 왕세자가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고, 그 틈을 이용해 왕실을 뒤흔드는 것. 꽤 효과적이지 않소?"
윤재는 이를 악물었다.
"네 야망이 무엇이냐?"
민서훈은 천천히 왕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
방 안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민서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라고?"
왕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너의 야망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너를 시험한 것이다."
순간, 방 안의 금군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좌의정 민서훈, 역적의 죄로 가두어라!"
민서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쳤다.
"말도 안 돼…"
왕은 무겁게 말했다.
"사필귀정이다. 네가 아무리 권모술수를 부려도, 하늘의 이치는 거스를 수 없다."
금군들이 민서훈을 포박했다.
그제야 윤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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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남겨진 자들
며칠 후, 홍연은 왕 앞에 홀로 섰다.
"네가 살아남은 것은 하늘이 정한 운명일지도 모르겠구나."
왕의 목소리는 깊었다.
"네가 원한다면, 다시 왕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다."
홍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제 제 삶을 살고 싶습니다."
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자유를 주겠다."
홍연은 윤재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홍연은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윤재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은 오직 그대뿐이오."
홍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들은 천천히 궁을 떠났다.
이제 그들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할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