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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도자기 (Moonlit Ceramics) 일상 소설

qooo2 2025. 4. 13.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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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도자기 (Moonlit Ceramics)


1장: 깨어진 찻잔
이수아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창밖으로 보이는 희미한 새벽빛은 이천의 도자기 가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몽환적이었다. 그녀는 습관처럼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낡은 찻잔을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아끼던 찻잔이었다. 섬세한 연꽃 문양 위로 희미한 금이 가 있었지만, 수아는 그 찻잔을 버릴 수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도예 공방 아르바이트를 가야 했다. 그녀는 흙을 만지고 물레를 돌리는 일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할 뿐이었다. 수아의 꿈은 화려한 도시에서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었지만, 현실은 이천의 작은 공방에서 시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점심시간, 수아는 깨진 찻잔에 따뜻한 보리차를 따랐다. 순간, 손끝에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찻잔의 차가운 감촉과 함께 아주 희미하고 슬픈 울림이 그녀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작은 파동이 일었다 사라졌다.
‘뭐지?’
수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곤해서 그런가?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환상까지 보이는 건가 싶었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애써 그 이상한 느낌을 무시하려 했다.
오후 작업 시간, 공방의 사장님은 귀한 손님이 맡긴 백자 달항아리를 조심스럽게 옮기라고 지시했다. 수아는 긴장한 손으로 달항아리를 붙잡았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강렬한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달, 그리고 그 아래에서 홀로 고뇌하는 듯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장면은 너무나 생생해서 수아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수아 씨! 정신 차려요!”
사장님의 다급한 목소리에 수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손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달항아리는 간신히 그녀의 품 안에서 균형을 잡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수아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깨진 찻잔에서 느꼈던 희미한 울림, 그리고 달항아리를 통해 보았던 슬픈 여인의 환영. 그것들은 단순한 착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하고 강렬했다.
2장: 숨겨진 이야기
그날 이후, 수아는 공방의 오래된 도자기들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빛바랜 청화 백자에서는 활기 넘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투박한 옹기에서는 땀 흘리며 밭을 일구던 농부의 거친 숨소리가 느껴지는 듯했다. 마치 도자기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수아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수아는 점차 이 기이한 능력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도자기에 손을 대면 그 도자기가 만들어지던 순간의 감정, 사용했던 사람들의 기억, 심지어 그 도자기가 겪었던 시간의 흔적까지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수아는 할머니의 깨진 찻잔을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이번에는 더욱 선명한 감정이 느껴졌다. 찻잔을 만들던 도공의 섬세한 손길, 따뜻한 차를 마시며 나누었던 가족들의 소소한 대화,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찻잔에 스며든 할머니의 따뜻하고 그리운 사랑이었다.
그녀는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신기하고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잊혀진 과거의 조각들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날, 공방 창고에서 먼지가 수북이 쌓인 오래된 상자를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빛바랜 종이들과 함께 낡은 백자 주병 하나가 들어 있었다. 수아가 주병을 손에 든 순간, 격렬하고 슬픈 감정이 그녀를 덮쳐왔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분노, 절망적인 슬픔, 그리고 간절한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의 폭풍우 속에서 수아는 한 여인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그 여인이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알고 싶었다. 수아는 사장님에게 그 백자 주병에 대해 물었지만, 사장님은 그저 오래된 물건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수아는 직접 그 백자 주병의 비밀을 파헤쳐 보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특별한 능력이 이 슬픈 이야기에 해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3장: 달빛 아래 진실
수아는 퇴근 후에도 공방에 남아 백자 주병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매끄러운 곡선, 은은한 빛깔, 그리고 손에 닿는 섬세한 감촉 속에서 그녀는 더욱 깊은 슬픔을 느꼈다.
며칠 동안, 수아는 이천 지역의 역사와 도자기에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 읽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오래된 기록 속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했다. 조선 시대, 뛰어난 솜씨를 가진 도공의 딸이 양반 가문의 아들과 비극적인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였다. 신분의 차이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그들의 사랑은 결국 여인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백자 주병이 그녀의 슬픈 마음을 담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다.
수아는 그 전설 속의 여인이 백자 주병을 통해 느껴졌던 슬픔의 주인공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여인의 억울한 죽음과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이 고스란히 주병 속에 남아 있다고 느꼈다.
어느 보름달이 밝게 빛나는 밤, 수아는 백자 주병을 들고 공방 뒤뜰로 나갔다. 달빛 아래에서 백자는 더욱 은은하게 빛났다. 수아가 조용히 주병에 손을 대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의 파동이 그녀의 마음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환영이 눈앞에 펼쳐졌다. 달빛 아래,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 애절한 눈빛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뺨 위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녀의 손에는 지금 수아가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의 백자 주병이 들려 있었다. 여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내 사랑… 부디 편히 잠드소서… 이 슬픔… 이 주병에 담아… 당신 곁으로 보냅니다….”
여인의 목소리는 바람에 실려오는 듯 희미했지만, 수아의 마음속 깊이 사무쳤다. 그녀는 여인의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절망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백자 주병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주병 표면에 새겨진 섬세한 문양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지자, 수아의 마음속에 맺혀있던 슬픔의 응어리 또한 서서히 사라져 갔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갇혀 있던 영혼이 해방된 것처럼, 백자 주병은 더 이상 슬픈 기운을 내뿜지 않았다.
4장: 새로운 시작
다음 날, 수아는 백자 주병을 깨끗하게 닦아 공방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았다. 더 이상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오랜 시간의 흔적과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긴 귀한 유물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아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더 이상 숨기거나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도자기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잊혀진 역사와 감정을 되살리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공방 사장님에게 자신의 능력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믿지 않던 사장님도 수아가 오래된 도자기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읊어내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장님은 수아의 능력을 활용하여 공방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보기로 했다.
오래된 도자기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특별 전시회를 열고, 수아가 직접 느낀 감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자기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도자기에 담긴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수아가 만든 도자기는 따뜻한 감성과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수아는 더 이상 패션 디자이너의 꿈만을 쫓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통해 이천의 전통 도자기를 세상에 알리고, 도자기 속에 담긴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
달빛 아래에서 백자 주병을 통해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들었던 그 밤 이후, 수아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는 우연히 발견한 특별한 능력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발견했고, 잊혀진 과거의 아름다움을 되살리는 의미 있는 일을 시작했다. 이천의 작은 공방에서 시작된 그녀의 이야기는, 달빛처럼 은은하고 아름다운 감동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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