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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소설/개그,공포,멜로소설 단편

벽 너머의 목소리 (단편소설) 민준의 시선

by qooo2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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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너머의 목소리


낡은 아파트,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홀로 사는 김민준 씨에게는 특별한 취미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옆집과의 ‘벽 너머 대화’였다. 옆집에는 누가 사는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사 온 첫날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기척과 가끔씩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 소리가 전부였다.
어느 날 저녁, 민준 씨는 퇴근 후 습관처럼 벽에 기대앉아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문득, 아주 작은 신음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으…” 하는 짧고 힘없는 소리였다. 민준 씨는 귀를 기울였다. 다시 한번, 더 작고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걱정이 앞선 민준 씨는 조심스럽게 벽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아주 느리고 약한 두드림이 벽 너머에서 응답해 왔다. 똑, 똑.
민준 씨는 용기를 내어 다시 벽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규칙적인 간격으로. 똑똑, 똑똑. 잠시 후, 옆집에서도 똑똑, 똑똑, 하는 응답이 돌아왔다. 마치 서툰 모스 부호 같았다.
그날 이후, 민준 씨와 벽 너머의 존재는 서툰 두드림으로 소통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는 세 번의 짧은 두드림과 한 번의 긴 두드림으로, ‘괜찮으세요?’는 두 번의 짧은 두드림과 두 번의 긴 두드림으로 약속했다.
벽 너머의 존재는 대부분 짧은 응답만 보내왔다. 가끔은 음악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날은 유난히 슬픈 멜로디의 피아노곡이었다. 민준 씨는 벽을 두드려 ‘힘내세요’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잠시 후, 아주 약한 한 번의 두드림이 돌아왔다. ‘고마워요’라는 의미일까.
시간이 흐르면서, 서툰 두드림 속에서도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짧고 빠른 두드림 속에 불안함이, 때로는 느리고 잦은 두드림 속에 외로움이 묻어났다. 민준 씨는 퇴근 후 벽에 기대앉아 옆집의 두드림을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희미한 연결고리가 그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다.
어느덧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왔다. 창밖에는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민준 씨는 여느 때처럼 벽에 기대앉아 옆집의 소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째, 벽 너머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던 음악 소리조차 멈춘 지 오래였다.
불안감이 엄습한 민준 씨는 밤새도록 벽을 두드렸다. 하지만 차갑고 묵묵한 벽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다음 날, 민준 씨는 용기를 내어 옆집 문을 두드렸다. 굳게 닫힌 문은 낯설고 차가웠다.
며칠 후, 옆집은 텅 비어 있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텅 빈 공간만이 남았다. 민준 씨는 텅 빈 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서툰 두드림으로 나누었던 짧은 대화들, 희미하게 들려오던 슬픈 피아노 선율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벽에 손을 대었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만이 느껴졌다. 더 이상 벽 너머의 따뜻한 온기도, 서툰 응답도 존재하지 않았다. 민준 씨는 문득, 진정한 소통은 벽을 허물고 서로의 공간으로 나아가는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툰 두드림은 시작이었지만, 결국 침묵으로 끝난 벽 너머의 소통은 그에게 깊은 여운과 함께 새로운 질문을 던져주었다. 그는 이제, 닫힌 문을 두드리는 대신, 자신의 문을 열고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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