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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소설/폐급힐러각성하다(게임판타지소설)

[시스템] 폐급 힐러, 각성하다 - 1편

by qooo2 2025.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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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폐급 힐러, 각성하다 - 1편


"강태준 님, 죄송하지만 이번 레이드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파티장의 싸늘한 목소리가 텅 빈 던전 대기실에 울려 퍼졌다. 강태준은 푹 숙인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그의 캐릭터, 레벨 53의 성직자 ‘세인트힐’의 하얀 로브 끝자락만 초라하게 떨렸다. 벌써 다섯 번째였다. 이번 주에만 다섯 번째 파티 퇴짜였다.
“저, 저번에 실수했던 건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아니, 태준 씨 잘못만은 아니에요.” 옆에 서 있던 마법사 ‘아크메이지’가 딱딱하게 말을 잘랐다. “그냥… 저희 파티 딜러 화력이 좀 부족해서요. 안정적인 클리어를 위해선 숙련된 힐러가 필수적이라…”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이미 ‘너는 짐짝’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강태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에오스 온라인>을 시작한 지 벌써 6개월. 남들보다 두 배, 세 배는 더 열심히 사냥하고 퀘스트를 깼지만, 그의 힐러 ‘세인트힐’은 여전히 파티원들의 불안 요소 1순위였다.
‘신성한 빛’ 스킬은 쿨타임만 길고 회복량은 쥐꼬리만 했다. ‘치유의 기도’는 영창 시간이 너무 길어 급박한 상황에선 쓰기도 전에 끊기기 일쑤였다. 컨트롤 미숙이라는 꼬리표는 늘 그를 따라다녔다.
“하아…” 결국 강태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거절이었다. 그는 파티에서 추방당하는 알림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혼자 남겨진 던전 대기실은 유난히 더 춥고 어둡게 느껴졌다. ‘나는 왜 이렇게 못하는 걸까.’ 자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른 힐러들은 화려한 광역 힐링으로 파티원들의 생존을 책임지고, 위기의 순간에는 강력한 보호막까지 펼치는데. 자신은 고작해야 딸깍거리는 마우스 클릭 몇 번이 전부였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던 강태준의 눈에 던전 입구 근처의 빛바랜 게시판이 들어왔다. 대부분의 퀘스트 공고는 이미 완료되었거나, 고레벨 파티 모집 글뿐이었다. 그는 무심코 가장 구석에 먼지가 쌓인 낡은 퀘스트 하나를 클릭했다.
[긴급] 사라진 고대 유물 회수 (실패율 극악)
보상: ???
제한 레벨: 50 이상
퀘스트 내용: ???
뭔가 이상했다. 보상도, 내용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 버그 퀘스트 같았다. 다른 유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듯 게시판은 조용하기만 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강태준은 мимо로 퀘스트 수락 버튼을 눌렀다.
시스템: 숨겨진 퀘스트 "[버그] 잊혀진 신전의 잔향"을 수락하시겠습니까?
‘버그?’ 망설일 틈도 없이 확인 버튼에 손이 갔다. 순간, 그의 캐릭터 ‘세인트힐’의 주변으로 기묘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 어어?”
발밑에서부터 강력한 힘이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에 강태준은 당황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캐릭터는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뜨자, 그는 낯선 공간에 와 있었다.
음침한 기운이 감도는 폐허. 부서진 석상과 무너진 기둥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습한 공기 속에는 알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퀘스트 정보창은 여전히 물음표로 가득했지만, 귓가에는 섬뜩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다.
“환영한다… 이방인이여…”
등골이 오싹해지는 목소리에 강태준은 주변을 경계했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빛이 번뜩였다. 썩은 살점을 드러낸 채 기이한 형상을 한 몬스터들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여긴 어디야? 그리고 저 몬스터들은… 처음 보는데!’
지금까지 그가 상대했던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섬뜩한 존재감이었다. 힐러인 그에게 공격 스킬 따위는 없었다. 도망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스템: 숨겨진 퀘스트 "[버그] 잊혀진 신전의 잔향"의 특수 효과가 발동되었습니다.
시스템: 공포 저항 +99%, 인지 능력 +50% 상승.
메시지가 끝나기도 전에, 강태준의 머릿속에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처럼 또렷하게 들어왔다. 붉은 눈빛의 몬스터가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다. 이전의 답답하고 굼뜬 움직임과는 전혀 다른 반응 속도였다.
‘뭐, 뭐야 이거…!’
놀라움도 잠시, 몬스터들은 끈질기게 그를 추격해왔다. 힐 스킬로는 이 흉측한 몬스터들에게 아무런 데미지를 줄 수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강태준은 문득 퀘스트를 수락할 때 느꼈던 기묘한 푸른빛을 떠올렸다.
그 빛은 단순한 버그가 아니었다. 뭔가… 숨겨진 힘이 그에게 스며든 것 같았다.
몬스터들이 좁혀오는 순간, 강태준의 손에 들린 허름한 지팡이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으… 윽?”
놀랍게도, 지팡이가 스친 몬스터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비틀거렸다. 데미지 수치는 ‘0’이었지만, 분명히 무언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게… 무슨 힘이지?’
강태준은 허리를 숙인 자세로 주변을 살폈다. 몬스터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지만, 이전처럼 압도적인 공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뇌는 빠르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회피 능력은 향상되었지만, 공격 능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이대로는 끝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감당할 수 없다.
그때, 그의 시야에 무너진 석상 틈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색 결정 조각이 들어왔다.  그는 그것이 퀘스트 이름에 붙어있던 ‘잔향’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꼈다.
몬스터들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강태준은 필사적으로 폐허 속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절망과 희망,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뒤섞인 채. 만년 폐급 힐러는 지금,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 속에서 탈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빛바랜 지팡이가 불안하게 떨렸다. 앞으로 그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격렬한 폭풍의 눈 속으로 그가 뛰어들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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